
경기도 포천은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수많은 독립운동의 흔적이 살아 있는 도시다. 그중에서도 최면식(崔勉植) 선생 공적비는 일제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한 인물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상징적인 유적이다. 포천 시민들에게 ‘포천의 독립혼(獨立魂)’이라 불리는 최면식 선생은 평생 나라의 자유와 민족의 자주를 위해 싸운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다. 이 글에서는 최면식 선생의 생애와 업적, 공적비 건립의 배경,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 유적을 통해 되새겨야 할 역사적 교훈을 살펴본다.
일제강점기 포천의 항일정신, 최면식 선생의 생애와 업적
최면식 선생은 1890년대 후반 포천 지역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나라 잃은 민족의 현실을 몸소 체험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이후, 그는 민족의식이 강한 청년들과 함께 항일계몽운동과 교육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일제의 동화정책이 강화되던 시기에도, 최면식 선생은 ‘배움이 곧 독립의 씨앗’이라 믿으며 포천 지역 청년들에게 한글교육과 민족사 교육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그는 포천 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한 핵심 인물로 참여했다. 당시 수백 명의 포천 시민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최면식 선생은 이 시위 후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옥중에서도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출옥 이후에도 그는 신간회 활동과 농민운동,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참여하며 지역의 독립정신을 이어갔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민족학교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었고, 해방 이후에도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서 청년교육에 헌신했다. 그의 삶은 단순한 ‘독립운동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포천이라는 지역 공동체가 일제에 맞서 싸웠던 자존심의 상징이었다.
그의 업적은 1970년대 이후 재조명되기 시작해, 결국 포천 시민들의 뜻으로 공적비 건립 운동이 추진되었다. 최면식 선생의 정신은 개인의 것이 아닌, 한 세대 전체가 지켜낸 민족정신의 표상이다.
최면식 선생 공적비의 건립 배경과 역사적 상징성
최면식 선생 공적비는 1980년대 후반 포천 시민들과 유림, 그리고 독립운동 후손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포천은 산업화로 급격히 변모하고 있었지만, “발전의 뿌리는 기억 속의 희생에서 비롯된다”는 시민들의 의지가 모여 선생의 뜻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공적비는 포천시 일동면 혹은 내촌면 일대에 자리하고 있으며, 잔잔한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전통 석조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비문에는 “나라 없는 백성으로 사느니, 죽어 조국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는 선생이 생전에 남긴 신념이자, 후대에게 전하는 항일정신의 메시지다.
공적비 건립 과정은 단순한 추모사업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묻혀 있던 지역 독립운동의 역사를 되찾는 과정이었다. 당시 지역 노인들과 후손들이 모여 구전으로 전해지던 독립운동의 흔적을 기록하고, 포천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전개 과정을 조사했다. 이 기록들은 이후 포천 독립운동사 발간의 토대가 되었고, 공적비는 그 결실의 상징물로 자리 잡았다.
현재 공적비 주변에는 ‘포천 독립유적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지역 학생들이 매년 현장학습을 통해 선생의 뜻을 배우고 있다. 조용한 비석 하나지만, 그 안에는 한 세기의 고통과 자부심이 담겨 있다. 최면식 선생 공적비는 포천이 단순히 자연의 고장만이 아니라, 항일정신이 살아 숨 쉬는 역사 도시임을 증명한다.
오늘의 포천에서 되살아나는 독립정신, 공적비가 주는 교훈
오늘날 최면식 선생 공적비는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보존하는 교육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포천시는 매년 광복절과 순국선열의 날에 기념식을 열고, 지역 청소년과 시민단체가 함께 참여해 헌화와 묵념을 올린다. 또한 포천교육지원청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일환으로 공적비 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학생들이 직접 현장을 방문해 독립운동의 의미를 배우고 있다.
공적비를 찾는 이들은 대개 조용히 서서 묵념하거나, 비석 앞에서 사진 한 장 남긴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느껴지는 울림은 크다. 바람에 흔들리는 태극기와 함께 선생의 이름을 되새길 때, 우리는 ‘현재의 자유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특히 청소년 세대에게 이 유적은 역사를 체험적으로 배우는 생생한 교과서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역사보다, 직접 눈앞에서 마주하는 공적비는 더 깊은 감정과 깨달음을 남긴다. 포천 시민사회에서도 이 공적비를 중심으로 한 역사문화 프로그램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역 문화원에서는 ‘포천 항일정신을 잇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고, 시민들이 스스로 지역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공적비는 과거를 기리는 동시에 미래 세대를 위한 ‘기억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최면식 선생의 독립정신은 “나라 사랑은 거창한 행동이 아니라,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포천의 이 공적비 앞에서 느끼는 진정한 감동이다.
[결론]
포천 최면식 선생 공적비는 한 개인의 업적을 넘어, 한 지역의 정체성과 정신을 상징하는 유산이다.
일제강점기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포천 사람들의 자존심이 이 비석 한 조각에 담겨 있다.
세월이 흘러도 돌에 새겨진 글귀처럼, 최면식 선생의 독립정신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공적비를 바라볼 때마다, 조국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이야기도 함께 떠올려야 한다.
그 기억이 이어질 때, 포천은 단순한 도시가 아닌 역사를 품은 공간, 독립정신의 산실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