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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과 일본미학 (작가, 책, 번역)

by memobyno 2026. 1. 23.

설국 북커버 이미지
북커버 이미지

 

 

디스크립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서정소설로, 이야기보다 분위기와 감각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작품이다. 유숙자 번역본은 가와바타 특유의 절제된 문체와 일본미학의 정수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한국어에 옮겨, 국내 독자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글에서는 설국이 어떻게 일본미학을 문학적으로 구현하는지, 그리고 이 작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를 중심으로 자세히 살펴본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일본미학의 문학적 구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일본 전통 미의식을 현대 문학 안에 섬세하게 녹여낸 작가로 평가받는다. 설국은 그의 문학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로, 서사적 사건보다 감각과 정서, 침묵의 여백을 중시하는 일본미학이 집약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어떤 분위기가 흐르는가이며, 이는 일본 전통 예술 전반에 깔린 미적 태도와 맞닿아 있다.

일본미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와비사비. 완전하지 않음, 덧없음, 쓸쓸함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은 설국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다. 눈 덮인 온천 마을이라는 공간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고요하고 반복적인 풍경 속에서 인물들의 감정이 미묘하게 흔들린다. 가와바타는 이러한 배경을 통해 인간 관계의 공허함과 덧없음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또 다른 일본미학의 특징은 여백이다. 설국의 문장은 짧고 간결하며, 설명을 최소화한다. 인물의 감정이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독자가 그 사이를 스스로 채워 넣도록 유도한다. 이는 일본 회화나 시()에서 중요한 여백의 미와 유사한 방식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끊임없이 멈추고, 느끼고, 해석하게 된다.

이러한 문학적 태도는 현대 독자에게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자극적인 서사와 빠른 전개에 익숙한 독서 환경 속에서 설국은 속도를 늦추고 감각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작품을 통해 일본미학이 단순한 전통 개념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하나의 철학적 시선임을 보여준다.

설국에 담긴 고독, 침묵, 그리고 덧없음

설국의 중심 정서는 고독이다. 주인공 시마무라는 도쿄에서 온 관찰자이자 이방인으로, 설국의 세계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머무른다. 그는 온천 마을의 게이샤 고마코와 관계를 맺지만, 그 관계는 깊어지지 않으며 끝내 공허함을 남긴다. 이 인물 관계는 일본미학에서 중요한 거리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와바타는 인물 간의 감정을 격렬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사랑, 연민, 집착 같은 감정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 짧은 대화와 시선, 침묵 속에서 암시된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감정을 읽어내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감정이 가장 짙게 응축된 상태로 기능한다.

또한 설국에는 덧없음에 대한 인식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눈은 아름답지만 녹아 사라지고, 인간의 감정 역시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다. 가와바타는 이러한 자연의 속성을 인간 관계와 병치시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킨다. 이는 일본미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모노노아와레’, 즉 사라짐에 대한 감응과 깊이 연결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정서는 오히려 더 큰 울림을 가진다. 빠르게 소비되고 잊히는 관계, 순간적인 감정의 소모 속에서 설국은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은 위로나 교훈을 주기보다, 고독을 고독 그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 태도 자체가 일본미학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유숙자 번역본의 특징과 도서로서의 가치

설국은 번역 난도가 높은 작품으로 꼽힌다. 원문은 극도로 절제된 문장과 미묘한 뉘앙스에 의존하기 때문에, 번역 과정에서 조금만 균형을 잃어도 작품의 분위기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유숙자 번역본은 이러한 위험을 비교적 잘 관리하며, 가와바타의 문체를 한국어로 안정감 있게 옮긴 번역으로 평가받는다.

유숙자 번역은 문장을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고, 원문의 간결함을 유지하는 데 초점을 둔다. 감정을 풀어 쓰거나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기보다, 독자가 느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이는 설국이라는 작품의 성격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번역이 친절해질수록, 오히려 이 소설의 미학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서로서 설국은 일본문학 입문자뿐 아니라, 이미 고전문학에 익숙한 독자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분량은 비교적 짧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밀도가 높아 천천히 읽을수록 더 많은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특성은 재독을 유도하며, 읽는 시기와 독자의 감정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유숙자 번역본은 일본미학의 핵심을 한국어 독자에게 무리 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단순한 줄거리 이해를 넘어, 분위기와 여운을 중시하는 독서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도서로서의 가치가 높다. 설국은 한 번 읽고 끝나는 소설이 아니라, 문학적 감각을 기르는 데 오랫동안 곁에 둘 수 있는 작품이다.

결론

설국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일본미학을 문학적으로 완성한 대표작으로, 고독과 덧없음, 침묵의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 존재를 성찰하게 만든다. 유숙자 번역본은 이러한 미학적 특성을 한국어로 안정감 있게 전달하며, 오늘날 독자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준다. 서사보다 감각과 여백의 힘을 느끼고 싶다면, 지금 설국을 다시 읽어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